생년월일 | 1985년 3월 28일 |
성별 | 수컷 |
조교사 | 오쿠히라 신지(奥平真治) |
생산지 | 메지로 목장 |
경주성적 | 14전 4승 |
몇 번이고 일어나는 유리의 중전차
88년도 클래식의 저력을 보이다
북경 땅에서 중국 경마사에 한 획을 긋다
● 스타트가 늦은 유리의 중전차
일본 최초의 암말 3관마 메지로 라모누(メジロラモーヌ). 그 라모누의 반형제로 태어난 그는 출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바로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어드마이어 베가를 보면 알겠지만, 쌍둥이로 태어날 경우에는 작은 체구로 인해서 경주마로 성공하지 못하는 설이 일반적이었다. 한쪽은 죽었지만 살아남은 그는 다행스럽게도, 징크스하고는 다르게 무럭무럭 커서 이후에는 500kg이 넘는 거구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렇지만 신은 공평한 법. 중전차로 불린 그였지만 문제는 목이 약점이었다. 게다가 체질 또한 강한 편이 아니어서 조교에도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2세 때는 골막도 잘 낫지 않아는 등 이런 연유로 결국 그의 스타트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되었다.
● 4세, 서서히 시동을 걸다
늦은 4세에 첫 레이스를 치루게 되어서 신마전이 아닌 4세 미출주마 경주에 나가게 된다. 게다가 그 경기는 잔디도 아닌 더트. 그렇지만 그는 당당하게 1승을 찍었고, 그 다음 1승 클래스 경기인 야마토 상(山藤賞)에서도 1착을 하여 순조롭게 2승을 찍게 된다. 이렇게 승격을 한 그가 다음으로 도전한 것은 NHK배. 바로 G2급 경기였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적수는 훗날 총알 슛으로 이름을 날린 사커 보이. 아쉽게도 2착을 찍긴 했지만 당시 그는 6번 인기였고, 게다가 그 사커 보이는 4착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선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 나아가 그는 G1 경기, 바로 일본 더비에 도전을 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그를 가로 막았던 것이 바로 마루젠스키의 아들, 사쿠라 치요노 오였다. 하물며 그 자리에는 이전에 붙은 사커 보이, 그리고 야에노 무테키까지 그에게 있어선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았던 것이다.
마루젠스키의 핏줄을 타고난 사쿠라 치요노 오.
텐 포인트의 재래라고 불리웠던 사커 보이.
지난 사츠키상을 제패한 야에노 무테키.
유리의 중전차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시련이었다.
하지만 일생에 한 번 밖에 없는 더비.
그도 양보할 수 없었다.
"사쿠라 치요노 오가 선두다!"
"그리고 안쪽에서 메지로 아르당이 힘낸다!"
"메지로 아르당! 메지로 아르당이 빠져나오는가!"
이것이 바로 신이 바란 결과였을까. 목 차이로 2착.
더비마의 영광은 사쿠라 치요노 오에게 찾아왔다.
배당 10.9의 인기 6위인 그에게 있어선 선전한 것이었지만,
한 발짝, 한 발짝만 더 앞서갔다면...
(중략)레이스 직전 게이트 뒤에서,
당시 기수 오카베 유키오는 말했었다.
"도중에 그만둘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조금만 더 하면 이길 거라는
장면을 만들어주었기에,
대단한 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더비 당시, 조교사 오쿠히라 신지 일대기 중
더비 당시 심하게 움직여서였을까, 골절로 힘들어하게 된 그를 위해 진영에서는 장기 휴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다시 복귀한 것은 1989년 5월. 약 1년 후의 일이었다.
● 5세, 꺼지지 않는 중전차의 엔진
NHK배와 더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유리 중전차는 연승 행진을 하게 되었다. 복귀전이었던 메이스 스테이크스 OP에서 1착, 그리고 타카마츠노미야배에서 1착. 지금은 G1 경기였지만 당시에는 G2급 경기였고 거리고 2000m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그의 상대는 뱀부 메모리.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대가 아니었고 그는 당당하게 레코드 기록을 찍으며 그를 꺾었다. 그렇게 그의 영광이 계속되리라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중전차 추락의 시작은 바로 마이니치배. 그렇다. 이름하여 헤이세이 3강이라는 파도에 그 역시 휩쓸린 것이었다. 회색 털의 괴물이라고 불리었던 오구리 캡. 밀 리프의 피를 이어받아 우수한 성적을 쌓아올린 이나리 원. 그리고 타케 유타카를 천재로 만들어 준 슈퍼 크릭. 마이니치 왕관에서도, 천황상 가을에서도 열심히 달린 그였지만 결과는 3착에 굴건염. 결국 진영은 다시 장기 휴양이라는 카드를 꺼내게 된다.
어느덧 6세가 된 그는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기 위해 다시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올커머 전에서는 1번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4착. 그리고 그의 경주마 일생 중 마지막으로 온 힘을 쏟았던 천황상 가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가 가는 곳에는 넘어야 할 시련들이 많았다.
야에노 무테키, 뱀부 메모리, 오구리 캡, 오사이치 죠지...
이번 천황상에서도 그 주역들은 모여들었으며
그 또한 그 주역들 중 하나였다.
88년도 클래식 세대들은 전부 어느덧 6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대들은 아직 힘이 넘쳐 있었다.
"직선 200m 앞! 야에노 무테키가 힘을 뺐다!"
"밖에서부터 오는 메지로 아르당! 메지로 아르당!"
"메지로 아르당 쫓아왔다! 나란히 섰다! 나란히 섰다!"
결과는 머리 하나 차이. 가을의 영광은 야에노 무테키가 가져갔다.
이번에도 한 발짝 부족했던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아쉬웠을까.
하지만 5번 인기에 배당 10.7이었던 그는 메지로의 저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도 견디기 힘든 적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세월이라는 무게였다. 2개월 후 아리마 기념에서는 은퇴하는 오구리 캡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며 그는 10착. 2번 인기 치고는 너무나 쓰디쓴 결과였다. 심지어 다시 굴건염이 발생해 또 장기 휴양에 들어가게 되지만, 결국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것일까. OP 후지 스테이크스(富士ステークス)에서는 6착, 재팬 컵에서는 14착. 동기들도 아무도 없었고, 그 또한 쓸쓸하게 재팬 컵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
● 중국에서도 그의 이름은 널리 퍼지리
경주마 당시 G1 승리도 없었고 아깝게 놓쳐 늘 2인자 자리를 차지한 그였지만, 훗날 세상 사람들은 그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종마 생활을 하다가 2000년 10월, 그는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북경용두목장(北京龍頭牧場)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비록 그는 2년 후 교배 중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자식이 그의 명성을 살려 주는 데 공헌한 것이였다.
아들의 이름은 우디(无敌). 무적이라는 이름의 뜻 답게 훗날 06년도부터 08년도까지 전국 경마속도대회에서 3연패라는 기록을 찍고, 심지어 08년도 베이징 대회에서는 8000m라는 장거리를 우승을 하면서 아르당의 이름을 되새기게 해 주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우선 무엇보다도 일본에선 전멸을 했던 노던 테이스트계를 중국에서 살린 것이었기에 혈통적인 면으로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 그리고 이 당시 중국 경마는 배팅 금지에 규모도 작았는데, 우디가 기존 중국 말들과의 격차를 보여주면서 이후 중국에서의 경마 문화도 점점 커지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중국 경마 역사계에 한 줄을 그은 것이었다.
행복할거에요.(메지로 아르당과 스릴쇼)그들은
일본에 있을 때보다
더 사치스럽게 살고 있으니까요.
01년도 메지로 아르당 북경에서의 생활 기사 중.
이것은 약한 체질이라는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훗날 경마계에 업적을 올린 한 경주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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