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월일 | 1989년 4월 14일 |
성별 | 수컷 |
조교사 | 미호(美浦)ㆍ사카이 카츠타로(境勝太郎) |
생산지 | 홋카이도 하야키타(早来)ㆍ샤다이 팜(社台ファーム) |
경주성적 | 21전 11승 |
수상경력 | 94년 JRA상 최우수단거리말 |
단거리와 마일의 구분을 바로잡은 그 말
은퇴 후 번식마로서도 쾌속마 배출하였던 그 명마
18년 동안 그의 기록을 깬 자는 아무도 없었다
● 사쿠라 군단, 그리고 샤다이 팜의 작품
지금도 스프린터1라고 하면 일본 경마사에서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칭해지는 그는, 1989년 하야키타의 샤다이 팜에서 태어났다. 그 어떤 위인도 심지어는 말도 그러했듯이, 그의 출생 또한 시작부터 평탄하지는 않았다. 그의 출생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샤다이 팜, 그리고 사쿠라 군단으로 유명했던 사쿠라 코마스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쿠라 코마스의 초대 오너는 전연식(全演植).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총련계 재일 교포였다. 파칭코 등 다른 사업도 하고 있었지만, "말은 가져도 마권은 사지 마라" 라고 할 정도로 경마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말을 하나 하나 소유하게 되면서 경주말의 이름에 '사쿠라'라는 관명을 넣어 주었는데, 이로 인해 사쿠라 군단이라는 존재가 태어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사쿠라 XXX 오」 이런 식으로 뒤에 오(王)를 붙이는 것 또한 사쿠라 군단의 전통. 87년도 최우수 4살 수마 상을 받았던 사쿠라 스타 오(サクラスターオー), 88년 최우수 3살 수마 상을 받았던 사쿠라 호쿠토 오(サクラホクトオー) 등도 이 사쿠라 군단의 소속이었다.
무튼 본론으로 돌아와 다시 바쿠신 이야기를 하자면, 오너 전연식은 이후 샤다이 팜을 찾아갔는데, 바쿠신의 어미였던 사쿠라 하고모로(サクラハゴロモ)를 목장에서 보고, 마음에 들어서 목장에 구매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대답은 NO. 이유는 당시 샤다이 측에서 목장의 기초 암말로 하고모로를 원했기 때문. 그 결과 양측에서는 서로 조정을 해 3년 동안 경주마로서 대여하는 식으로 하고, 그 조교사는 사카이 카츠타로가 맡기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순조롭지 않았다. 결국 하고모로는 골절 등으로 인해 2년 동안 달리고 경주마 생활에서 내려온 것. 이렇게 되면 계약한 것과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 하고모로에게 태어나는 첫 자식을 준다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식이 태어났는데, 그 자식이 바로 사쿠라 바쿠신 오였던 것.
그런 우여곡절로 태어난 그였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가 끝이 아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건강한 말이 아니었던 것. 데뷔 전까지만 해도 왼쪽 앞다리 계관절 내측에 골막이 생겼고, 조금 빠른 곳을 달리면 계관절이 붓는 등 발 밑이 약한 말이었던 것. 그의 아버지 사쿠라 유타카오(サクラユタカオー)도 발 밑이 약했고, 심지어 성격 또한 아비와 똑같이 얌전한 성격이라 유전적인 영향이 강한 말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그는 92년 1월. 겨우겨우 데뷔전에 나가게 된다.
● 스프린터의 소질이 보였던 초기
여러모로 심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첫 데뷔전에서 당당히 1착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에도 1600m전에서는 스타트가 늦었지만 그래도 2착, 다음 1200m전에서도 1착을 찍는 등 순조로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당시 바쿠신 진영은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지금까지의 경기를 보면 4마신 차로 압승을 하는 등 좋은 결과를 보여, 단거리로 전향을 할지, 아니면 이대로 나아가 중거리에도 도전을 할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었다. 마주였던 전연식 등과 상담한 결과, 바쿠신 진영은 일단 한번 중거리에도 도전해 보기로 결정. 그래도 다음으로 결정된 것이 후지 TV 스프링S. 즉, 사츠키 상 트라이얼 경주이자, 그에가 있어 1800m의 경기였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하였다. 12착 참패. 거리 적성이 안맞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이보그라 불리던 미호노 부르봉(ミホノブルボン)이 존재하였기에 그가 나설 자리는 없었던 것. 또한, 당시 바쿠신에 기승하였던 기수 코지마 후토시(小島太)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록 평평한 좋은 마장이었다 하더라도,미호노 부르봉을 당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스피드를 살릴 수 있는
짧은 거리가 베스트라고 생각한다.
만약 오늘 경기에서, 설령 사츠키 상 출전권를
따냈다고 하더라도 실전은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출전권을 얻지 못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수 코지마 후토시(小島太)의 인터뷰 중
비록 참패를 겪었지만, 이 경기로서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이 정해졌고, 이후부터 그의 본격적인 달리기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스프린터로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다
그렇게 그가 다음으로 출전한 곳은 단거리 중상전이었던 크리스탈 컵(G3). 사츠키 상의 추첨을 포기하고 선택한 결과는 단연 1착이었다. 이후 마주 전연식의 고장이었던 도쿄경마장의 菖蒲S에서도 1착. 점점 단거리로써 빛을 발하는 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과로써만 보면 좋다고 할 수 있었지만, 역시나 어렸을 때의 건강적인 문제가 있어서였을까. 그는 시한 폭탄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달리는 도중에 걸리는 듯 하면서 마지막에 다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이는 등, 거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그 불안 요소는 다음 경기에서 터지고 말았다. 뉴질랜드T 4세 경기에서 7착을 찍고 건강적인 면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에, 결국 그에게 휴양이 주어지게 된다. 이후 다시 9월에 복귀해 여러 경기에 나갔지만, 1600m라는 거리가 아직 그에게 버거운 것이었을까. 3착, 7착 등을 하면서 겨우겨우 버티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된다. 결국 이를 파악한 바쿠신 진영에서는, 아직 마일전은 그에게 이르다고 생각하여 다음 경기를 1200m인 스프린터즈S(スプリンターズS)로 전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있어서 첫 G1 경기였던 것이었다.
단거리에서 강한 그였기 때문에 진영도 그렇게 파악했고, 팬들 또한 단거리에서 강한 그를 봤기 때문에 3번 인기라는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단거리라 할지라도 그 벽은 그에게 너무나 컸던 것일까. 마일 챔피언쉽에서 연패를 했던 다이타쿠 헬리오스(ダイタクヘリオス), 오우카쇼에서 우승을 한 니시노 플라워(ニシノフラワー)가 강했기에, 결국 그는 1200m임에도 불구하고 6착이라는 뼈아픈 패배를 하게 된다. 또한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1400m 이하로 패배를 한 경력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 이후 그의 각부가 더욱 위험해진다고 판단하여, 결국 장기 휴양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은 93년 상반기를 완전히 날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선 이것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휴양으로 인해 그는 완전히 다른 말로 변했다. 앞으로 달리기만 했던 그는 페이스를 억누를 수 있는 선행 패턴을 익히고, 체중도 10kg가 늘어 좋은 체형이 되거나, 늘 문제였던 발도 새로 생긴 우드칩 코스로 인해 강화되는 등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리라 다들 기대를 하였다.
● 폭진왕 탄생, 스프린터즈S
그가 다시 잔디로 돌아온 것은 93년 10월. 첫 경기는 오탄 스프린터S(オータムスプリントS)였다. 결과는 보란듯이 1착. 당시 마린S등 오픈 연승에, 센칸S(靑函S)에서 2착을 하는 등 인기 있던 빙고 하나코(ビンゴハナコ)를 누른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 경기를 본 일본의 유명 평론가 메구로 코지(目黑考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4살 봄까지만 해도잘 달아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5살 가을 오탄 스프린터S를 보고,
이걸로 금년의 스프린터즈S는
이 말일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메구로 코지(目黑考二), 출처는 저서 60years 명마전설
이후 그는 승승장구를 하기 시작. 아일랜드 트로피에서는 4착을 찍긴 했지만, 그 다음 캐피탈S에서는 1착을 하면서 단거리 말로서의 이미지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93년도 스프린터즈S. 야마닌 재퍼(ヤマニンゼファー) 등 여러 강호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띈 것은 역시나 작년 스프린터즈 우승마였던 니시노 플라워였다.
여기에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스프린터즈S가 개최되기 8일 전, 마주 전연식이 병으로 사망. 기수 코지마는 친부모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마주와 사이가 좋았고, 코지마도 전연식을 '오야지'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나 이 둘이 친했냐고 하면, 당시 한국의 장례식 같은 경우에는 혈연자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유일하게 코지마만은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 단지 이기고 싶다는 욕망이 아닌, 승리를 의무할 수 밖에 없는 경기였고, 바쿠신에게 있어선 두 번째 도전이었기에, 그들에게는 투지가 타오르는 레이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작년의 패배를 가슴에 안고 그들은 달렸다.
야마닌 재퍼와 그 뒤로는 니시노 플라워가 그를 쫓아온다.
"200미터 돌파! 사쿠라 바쿠신 오다! 사쿠라 바쿠신 오다!"
그들은 최종 직선에 들어서자마자 단숨에 달리기 시작한다.
그 뒤를 추격하는 야마닌 재퍼. 하지만 그들은 작년과 달랐다.
그들에게는 패배라는 경험과, 기수에게는 오야지의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선두는 사쿠라 바쿠신 오! 사쿠라 바쿠신 오 G1 제패!"
정신을 차려 보니, 2마신 반 이상으로 그들은 야마닌 재퍼를 떨쳐 놓았다.
이것이 바로 폭진왕으로서의 탄생이자, 첫 G1 제패.
그리고 기수 코지마에게 있어선 추모전으로서의 성공.
5세가 된 단거리 말은 그렇게 최고의 스프린터가 된 것이었다.
● 이것이 마지막 사랑의 채찍
6세가 되었어도 그의 기량은 여전하였다. 이 당시엔 스프린터즈 G1이 해에 한 번밖에 하지 않았던 시대. 봄을 2전으로 일단락 지었던 사쿠라 바쿠신 오는 가을의 4전에서 전력투구하였다. 외국산 말들과의 경쟁이었던 야스다 기념, 그리고 1800m로 거리가 길었다고 보여진 마이니치 왕관도 하이페이스로 달아나 4착으로 분투. 당시 마일과 단거리의 기준이 애매하였던 그에게 있어서는 어떻게든 발버둥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그에게 있어 최고의 라이벌은 바로 마일의 여왕 노스 플라이트(ノースフライト)였다. 야스다 기념에서는 1착한 노스 플라이트와 0.5초 차이로 4착으로 패배. 하지만 그 설욕은 이후 스완S에서 1마신 1/4로 압승. 게다가 1400m에서 처음으로 1분 20초의 벽을 깨고 1분 19초라는 신기록을 세워 완벽하게 복수전을 성공하였다. 조교사 사카이도 당시 마이니치 왕관은 1800m니까 패배를 인정해도, 적어도 스완S에서는 암말에게 2번이나 질 수 없기에 이기고 싶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결국 이후 마일 챔피언S에서 노스 플라이트에게 우선권을 내주어 2착이란 결과를 빚어, 결국 1600m 이상에서는 노스 플라이트에게 이길 수 없는 아쉬움을 선사해 주었다.
그것은 그대로 결국 94년 12월. 그에게 있어서도 마지막 은퇴 레이식이 찾아왔으니, 바로 그의 세번째 도전이었던 스프린터즈S였다. 역시나 마지막 경기라서였을까, 그에게 있어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당시 스프린터즈S가 처음으로 국제 레이스로 승격되어 외국말이 3마리나 참가하게 된 것. 미국 스프린터계를 대표하는 말 소비에트 프로블럼(ソビエトプロブレム) 등 강호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6배의 압도적인 인기로 지지를 받으며 경기가 진행되었다.
전방의 말들과는 32.4초라는 초 하이 페이스.
그는 4번째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4코너.
"소비에트 프로블럼이 조금 밖으로 나갔다! 약간 힘든 건가!"
이것이 찬스였을까. 그 또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안쪽으로 쿄에이 키맨이 왔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달린다.
"これが最後の愛のムチ! これが最後の愛のムチ!"
"バクシンオだ!バクシンオだ!"
(이것은 마지막 사랑의 채찍! 박신오다! 박신오다!)
그리고 당당하게 4마신 차로 골인. 기록은 1분 7.1초였다.
이것이 그의 은퇴 경기로 스프린터즈 2연패였으며, 신기록 갱신.
이어지는 중계의 한마디.
"코지마 기수, 왼손으로 큰 열망을 보여주었습니다"
● 은퇴 이후의 단거리의 왕자
이 경기 이후, 일본의 단거리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타카마츠노미야 기념도 1200m로 단축되었고, 이전까지 잘 정비되지 않았던 스프린터 노선 정비 이야기가 나오는 등, 단거리와 마일의 기준을 확실하게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JRA에서 94년 최우수 단거리말 상을 받기도 했고, 이후 팬들에게도 스프린터 중에서 가장 빠른 말을 꼽으라면 바쿠신이 나올 정도로 그만큼 일본 경마사를 바꾸어 놓았던 말이 아닐까.
은퇴한 이후에도 그는 활발했다. 은퇴한 그는 씨수말이 되었는데, 선데이 사일런스, 토니 빈, 브라이언즈 타임 등 외국산 씨수말이 주류이던 샤다이 스텔리온 스테이션의 씨수말이 된 것. 샤다이에서 살게 되는 것은 한 마리의 엘리트로 선언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교배를 시작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는데, 그 결과 쇼난 캄프, 그랑프리 보스 등등 단거리 G1 우승마들을 낳았고, 16년 연속 100마리 이상과 교배할 정도로 씨수말로서 엄청나게 활약을 하다가 결국 2011년 4월.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략) 사실, 난 은퇴한 이후 발매되었던
사쿠라 바쿠신 오 라이터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사쿠라 바쿠신 오의 모습이 새겨지고,
그 뒷면에는 1분 7.1이라는
JRA 레코드가 기록되어 있는 그 라이터.
나는 그 라이터를 가지고, 매년 스프린터즈S가
개최되는 날엔 나카야마 경마장에 간다.
그리고 레이스 직전 코스를 향할 때
"너희들이 이 기록을 깨부술 수 있겠느냐!" 하며,
그 라이터를 휘두른다.
급격한 언덕이 있는 나카야마에서
바쿠신 오의 기록이 정말로 깨진다면 미안하겠다만,
그 날이 올때까지 나는 아마
이 라이터를 휘두르지 않을까.
메구로 코지(目黑考二), 출처는 저서 60years 명마전설
여담으로, 그 유명한 키타산 블랙의 외조부가 바로 이 사쿠라 바쿠신 오.
이것이 바로 순수한 스프린터이자, 일본 경마사를 뒤틀었던 어느 경주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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